파산(도산)절차의 본질은 집합적 채권추심이다.
즉 어느 채권자가, 어떤 재산을 얼마나 가지고 갈 것인가를 정하는 과정이다. 한편으로는 채권의 조사와 확정, 다른 한편으로는 재산의 수집과 정돈이라는 두가지 활동으로 구현된다. 즉 누가? 무엇을? 이 두 물음에 답하고, 현금배당(‘파산’) 또는 권리변경(‘회생’) 방식으로 채권자들의 권리를 실현한다.
먼저 “누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보자. 각 채권자가 얼마나 가지는가는 민사실체법에 의하여 결정된다. 이것은 민사법에 봉사하는 파산법의 본질상 당연한 것이다. 모든 채권을 만족시킬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제약조건 때문에 채권자의 추심과 집행권능이 제한되는 것일 뿐이며, 파산절차가 추구하는 바는 어디까지나 민사법상 채권의 실현이다. 따라서 법률이 정한 우선순위는 파산법에서도 변함이 없다. 담보권자는 그 순위에 따라 일반 채권자에 우선하며, 조세채권, 임금채권, 선박우선특권, 임차권 같이 민사집행상 특별한 우선적 지위를 가지는 권리는 파산법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취급된다. 예를 들어 수집된 재산이 100이고 조세채권이 80이고 일반채권이 100이라면, 재산 중 80을 조세채권 변제에 사용하니 일반채권은 5분의 1인 20만을 변제 받는다.
더 나아가, 예를 들어 임금채권이 20이 더 있다면, 일반채권은 아예 변제 받지 못한다. 실무상 대부분의 파산절차에서 우선순위가 없는 일반의 채권자가 변제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크지 않다. 어떤 채권자는 이를 들어 파산절차를 비난하나, 이것은 파산절차의 탓이 아니라 민사실체법 탓이다. 채권자들 전원이 합의한 우선순위도 원칙적으로 존중 받는다. 민사법상 인정되는 사적 자치의 원칙은 파산법에서라고 하여 굳이 부인될 필요가 없다.
민사법상 채권이 확정되어 있다면 파산절차에서도 이에 따른다. 그렇지 않은 경우, 채권신고를 하면 절차에 관여할 수 있다. 채권신고는 말하자면 민사법에서 소송의 제기에 해당한다. 채권신고에 대하여 이의가 없으면 마치 의제자백이 성립하는 것처럼 채권은 확정되고, 이의가 있을 때에는 조사확정재판을 신청하여 파산법원이 1차적으로 권리의 존부를 판단하고 그 재판에 대한 불복은 일반의 민사소송절차에 의한다. 일반의 파산절차에서는 파산채권을 신고하지 않으면 아예 배당을 받을 수 없다. 민사법상의 처분권주의가 파산절차에서도 실현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금융기관이 채무자인 파산절차에서는 파산관재인인 예금보험공사가, 회생절차에서는 관리인이, 개인회생절차에서는 채무자 자신이 채권자의 신고에 앞서서 채권자들의 목록을 제출한다. 이 목록에 채권자에게 다른 의견이 없으면 굳이 따로 채권신고를 따로 할 필요가 없다.
다음 “무엇을?”이라는 질문에 답하여 보자. 채권자들이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결국 채무자의 재산이다. 채무자의 재산은 전부가 채권자들을 위하여 바쳐질 것이 예정되어 있으며 다만 개인인 경우 절차 개시 후의 원인으로 인하여 취득한 재산이 제외될 뿐이다. 제3자의 소유권과 담보권은 존중된다. 예를 들어 환취권(還取權) 및 별제권(別除權)의 규정이 그것이다. 제3자는 자신의 소유물에 대하여 반환청구를 할 수 있으며, 담보권자는 물건 위에 성립한 자신의 담보권에 관하여 파산절차에서는 그 행사를 방해 받지 않으며, 회생절차에서는 일시 방해 받지만 그 담보가치 이상을 변제 받는 방식으로 권리를 존중 받는다.
채무자의 권리는 모두 파산절차에 포섭되어 채권자들에게 봉사하지만, 파산절차 외에서 채무자가 할 수 없는 행위는 절차가 개시되었다고 하여 가능하게 되지 않는다. 즉 파산절차는 민사법 기타의 법률상 채무자의 지위를 개선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산한 저축은행과 사이에 허위표시인 대출약정으로 인하여 채무자로 기재된 자는 선의의 제3자인 파산관재인에게 허위표시의 무효임을 주장하지 못한다는 판례(대법원 2003. 6. 24. 선고 2002다48214 판결 등)는 이 원칙을 크게 벗어난 것이다. 파산이라는 사정으로 채무자가 가질 수 없었던 이득을 채권자가 누리게 되는 것이다. 공적 자금 손실에 책임 있는 외관을 만들어내는데 협력한 자에 대한 제재라는 정책적 이유에서 민사법을 왜곡하는 판결이 나온 것이 아닌가 추측하지만 그렇다고 민사법상 권리를 확장할 이유는 없다.
파산절차는 채무자의 지위를 저감하지도 않는다. 즉 채무자에 대하여 의무를 부담하는 자가 파산절차가 개시되었다고 하여 의무를 면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임대인의 파산은 임대차계약의 종료사유가 아니다. 임차인의 파산은 임대차계약을 종료할 사유가 되지만(민법 제537조), 이것은 임차인 측이 채권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일 뿐 상대방인 임대인의 이익을 위한 해지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파산절차가 개시되면 채무자의 상대방이 쌍무계약을 해제, 해지할 사유가 된다고 정하는 이른바 도산해지조항(ipso facto clause)은 선진 파산법제에서는 무효로 인식되고 있으며, 우리 파산법상으로도 채무자 측에 계약의 유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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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채무자가 모든 채권자들을 만족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 ‘누가,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 지를 집합적으로 정하는 것이 파산법이라는 시각을 제시하였다. 이제 ‘어떻게?’라는 의문에 답함에 있어서, 우선 법인에 대하여 적용되는 파산절차를 먼저 살펴 보고나서, 파산절차 이후 개인의 삶에 대한 배려가 추가되는 개인파산절차, 그 변형인 개인회생절차, 계속기업을 전제로 하는 회생절차의 순서로 살펴 본다.
파산은 채무자도 채권자도 신청할 수 있는데(제294조 제1항), 법인의 경우 채무자를 위하여 파산을 신청하는 것은 자연인인 이사, 무한책임사원, 청산인 등 ‘기관’이다(제295조 내지 제297조). 회사의 경영자로서는 재무위기 상황에서도 파산을 신청할 인센티브가 크지는 않다. 운영되고 있는 회사라면 우선은 회생절차를 진행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채무자의 재산을 제3자에게 맡기고 걸어나가는 것을 선호하는 채무자도 있고, 채무자에게도 채권자들의 심리적 포기 이외에 지급불능의 공적 선언으로부터 오는 몇 가지 반사적 이익(후술)을 줄 수 있다. 채권자도 단독으로 채권금액에 관계 없이 신청할 수 있다. 채권과 파산원인사실을 입증해야 하지만(제294조 제2항), 그것은 어렵지 않다.
채권자의 신청이 의미 있는 것은, 재산관리권을 제3자에게 넘긴다는 압박이 채권자의 의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채무자가 순응하면 파산신청을 취하하고 거절하면 쫓아낼 수 있다. 예를 들어 A은행으로부터 100억 원의 무담보 융자를 받아 영업을 개시한 B법인이 당초 예상보다 사업이 잘 안 되어 원리금 상환을 포기하고 그냥 영업을 하고 있는데 그 영업의 가치가 60억 정도이지만 청산하면 10억원 정도 남을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A은행은 혼자서 강제집행에 나선다고 해도 최고 10억원을 회수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A은행은 B법인을 상대로 파산을 신청하고, “당초 원금의 반인 50억원을 상환할 수 있다면 파산절차를 취하하고 나머지는 면제해 줄 수 있다”는 식으로 제안할 수 있다. 쫓겨나면 갈 곳이 마땅치 않고 가끔 부실의 책임까지 져야 하는 B법인의 경영자로서는 파산을 피하기 위하여 거래제안에 응할 인센티브가 있다. A은행은 다 받으려다가 못 받는 것보다 낫고, B법인 경영자는 쫓겨나는 것보다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낫다.
은행, 보험회사, 상호저축은행 등 모든 금융기관에 대하여는 정부기관인 금융위원회가 파산의 신청을 할 수 있다(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 제16조 제1항). 금융기관의 지급불능 처리를 채권자, 채무자 사이의 사적 자치에만 맡기지 않는 것은, 금융기관의 부채 대부분을 차지하는 예금채무는 화폐로서의 성격이 있어 사적 경제주체 사이에서의 채권, 채무관계라는 형식에 불구하고 국가의 후견적 관심이 미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파산절차의 진행에 있어서도 금융위원회가 파산관재인을 추천하도록 하고 있으며 보통 예금보험공사가 파산관재인이 된다(같은 법률 제15조 제1항). 예금자보호법에 의한 대지급을 이행한 최대채권자로서 파산절차의 진행에 이해관계가 가장 크고, 또 파산절차에 의한 배당을 실시할 기술적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법원은 어쩌면 수십만, 수백만의 파산채권자들로부터 파산채권신고를 받는 대신에 예금자표를 파산참가기관으로부터 받는 것으로 갈음한다(같은 법률 제21조).
채무자이든 채권자이든 제3자이든 파산절차를 신청하지 않았는데 파산선고가 내려지는 경우가 있다(제6조 제1항 및 제2항). 흔히 ‘견련파산’이라고 하는 것인데, 회생절차를 파산절차의 한 변형으로 보고 파산절차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회생절차가 속행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당사자 신청이 없는 한 사법절차가 개시되지 않는다는 민사절차법상의 원칙의 예외를 구성하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파산의 원인은 지급불능이다(제305조 제1항). 이것은 채무자가 변제능력이 부족하여 즉시 변제하여야 할 채무를 일반적, 계속적으로 변제할 수 없는 객관적 상태를 말하는데, 지급정지가 있으면 지급불능으로 추정된다(제2항). 법인의 경우 부채가 자산을 초과할 때에도 파산할 수 있다(제306조 제1항). 모든 부채가 한꺼번에 지급을 청구 받는 것은 아니므로 채무초과이면서도 지급불능은 아닌 상태가 있는 것이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법인의 존속가능성에 영향을 주는 것이므로 구성원이 유한책임을 누리는 법인의 경우에는 지급불능이 아니더라도 정리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사원의 개인적 자산과 신용에 의존하는 합명회사, 합자회사는 운영될 때에는 채무초과를 파산의 원인으로 하지 않는다(제2항).
이 지급불능이나 채무초과라는 파산원인이 존재하는 지는 법원이 심사한다(제309조 제1항 제3호). 채무자가 신청할 때에도 생략할 수 없다. 채권자가 파산을 신청할 때에는 채무자는 채권의 원인을 다투기보다는 송달을 받지 않는 등 절차 진행을 방해하고 또 비록 지금은 지급하지 못하였지만 지급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모순되는 절망적 주장을 하면서 파산선고를 지연하려고 노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사이에 채무자인 법인의 대표가 재산을 은닉한다면 후일 찾아올 수 있는 실체법상 권리가 있다고 한들 주효하지 못할 수 있다. 채권자로서는 적극적으로 채무자의 구인(제322조)이나 보전처분(323조)을 신청할 필요가 있다. 채무자가 신청하는 경우에는 파산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채무자가 절차 진행을 방해할 이유가 없으므로, 신청 즉시 절차가 개시되는 방향으로 운영함이 바람직하다. 선진 파산법제는 그렇게 한다. 우리는 그렇게까지 선진적이지 않다. 다음 회에서는 파산절차의 기관에 대하여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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