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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기원전 300년경에 쎈느강의 섬에 정착했다고 한다

기원전 300년경에 쎈느강의 섬에 정착했다고 한다

① 기록에 의하면 켈트족의 빠리지(Parisii)라는 부족이 기원전 300년 경에 쌘느강의 섬들에
    정착했다고 한다.

② 기원 후 52년 시저에 의해 갈리아 지방이 정복되면서 빠리는 로마의 속주가 된다.
    당시 빠리는 루테시아(Lutecia, 불어로는 Lutece)로 불리웠다.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빠리는 상당히 팽창을 했다.
    정복자들은 로마식으로 도시를 세웠다. 광장과 사원, 그리고 재판장을 포함하는 포럼이
    높은 곳에 위치했고, 지금도 남아 있는 목욕장이(그 건립연대는 2세기말에서 3세기 초로
    추정됨) 포럼 주위에 세워졌다.

③ 3세기 중엽부터 골 지방의 북쪽의 반은 게르만족의 이동에 의해 황폐화되었다.
    빠리인들은 야만인들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씨떼 섬을 중심으로 성벽을 쌓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사람들은 섬에서 나와 강의 좌안과 우안에 도시를 건설했다.

④ 4세기부터 야만족의 위협이 더욱 거세졌기 때문에 빠리는 로마의 방어요새였고, 이곳을
    통해 주요 관통로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곳에 머물었던 쥘리앵(357-358, 359-360년 사이)은 355년 뤼때드라는 이름을 빠리로
    바꾸었다.

⑤ 로마가 멸망한 후 빠리의 도시규모는 다시 축소되어, 씨떼 섬 내로 한정되었다.
    450년 쥬느비애브는 빠리시민들을 규합하여 훈족의 침입에 대항하였다.

⑥ 로마시대보다 작은 규모로 유지되던 빠리는 메로빙 왕조와 카롤링 왕조를 거치면서 다시
    주요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클로비스는 508년 빠리를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⑦ 10세기말 까뻬왕조가 등장하면서 씨떼 섬에 왕이 머물 궁전이 세워졌다.
    당시 프랑스는 쌘느 강을 중심으로 방위노력을 하였고, 이에 따라 빠리는 수도로서 확고한
    자리를 굳혔다.
    루브르 궁이 도시의 서단(西端)에 세워졌다.

⑧ 필립쁘 오귀스뜨의 치하에서 빠리의 영토는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씨떼 섬을 중심으로 우안(右岸)에 상업 및 주거지가 들어섰고, 좌안(左岸)에
    대학지구(Quartier latin)가 형성되었다.
    13세기부터는 모든 왕국의 공공기관들이 이곳에 집중되었다.

⑨ 1370년 경에 지어진 성벽은 쌘느강의 북쪽부분이 새롭게 빠리에 포함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빠리의 경제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오늘날과 같은 빠리의 경계는 1841년 성벽(이 성벅은 오늘날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도시
    순환도로가 들어서 있다)을 지으면서 확정되었다.

⑩ 19세기 중반에 일어난 오스만의 빠리개조계획은 중세적인 빠리의 도시구조를 근대적으로
     탈바꿈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산업혁명 이후 농촌지역에서 도시로의 인구 유입은 가속화되었고, 산업혁명기 서구 공업도시는 환경을 파괴하였으므로 인구가 과밀한 지역의 위생상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오스만은 이런 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첫번째로 교통망을 조직하고, 둘째로 도로망 이외에도, 물을 계속 흐르게 하고, 하수구를 설치하며, 가로수를 심어 청결한 도시를 만들고, 셋째로 여러 시설을 지었다. 시청과 구청들, 도서관, 교회, 극장, 공공 시장 등을 전 도시에 고르게 분포시켰으며, 빠리의 구(arrondissement)를 20개로 정하기로 하였다.